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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제정세

중동석유의 역사와 세계경제

by 자연과더불어 2023. 10. 17.

원유 매장량과 생산량의 국가별 순위를 보면 50% 이상 중동 국가들이 포함되어 있습니다. "중동의 석유를 지배하는 자가 세계를 지배한다"는 말이 있듯 중동의 석유는 세계 경제에 많은 영향을 끼쳤습니다.

 

 

1. 중동에서의 석유 발견

지질학자들이 19세기 페르시아 지표조사 후 석유 침출수가 많이 매장되어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고 1900년 파리 엑스포에서 이 사실을 공표했습니다. 이 소식을 들은 아일랜드 출신의 윌리엄 다아시가 1901년 이란의 왕이었던 무자파르 알딘 샤로부터 페르시아 채굴권을 샀지만, 너무 적은 생산량으로 난항을 겪었고 이로 인해 이란 석유 채굴권을 영국의 버마 석유회사에 판매했습니다. 이후 석유 시추를 지속하였으나 여전히 석유가 발견되지 않아 1908년 현장 책임자에게 석유 시추를 중지하라는 편지를 보냈습니다. 그러나 그 편지가 도착하기 바로 전날 이란의 마스제드 솔레이만에서 대규모 유전이 발견되었습니다. 본격적인 시추 진행을 위해 영국, 네덜란드 합작회사인 앵글로 페르시안 오일 컴퍼니(APOC)를 설립했습니다,

2. 제1차 세계대전과 석유수요

1910년 경 영국은  석탄 군함을 효율이 좋은 석유 군함으로 개조하였고 석유 군함에 필요한 석유를 확보하기 위해 APOC의 지분 51%를 매입하였고 1914년 세계 1차 대전 발발한 이후 영국에게 엄청난 이익을 가져다주었습니다. 이후 석유는 전략적으로 중요한 자원이 되었고  이후 중동지역은 석유 쟁탈전의 중심지가 되었습니다. 

3. 오일 캠프의 등장

이란에서 석유가 채굴된 후 영국은 오스만투르크가 지배하던 중동지역에 눈을 돌렸고, 세계 1차 대전 이후 프랑스와의 밀약으로 이라크를 위임통치하였습니다. 투르크석유회사를 설립해 이라크와 탐사권과 채굴권에 대한 계약을 체결하고, 1927년에 키르쿠크 일대에서 석유가 발견하게 됩니다. 이라크에 살던 쿠르드 민족의 독립을 지지하였던 영국은 석유의 발견으로 이라크 편에 서게 되고, 쿠르드 민족의 이라크로부터의 독립은 실패하게 되었습니다. 이라크에서 석유가 발견되었단 소식이 전해지자 미국과 프랑스 석유회사들이 뛰어들었고 이라크는 오스만투르크의 패전으로 생겨난 나라였기 때문에 영국이 이라크의 석유를 독점할 수 없었습니다. 이로 인해 영국, 미국, 프랑스 석유회사들은 1928년 7월 31일 레드라인 협정에 합의했습니다. 체결 당사자는 영국의 앵글로 페르시안 석유(후에 BP), 영국과 네덜란드 합작사 로열더치 셀, 프랑스 석유회사(후에 Total), 미국의 엑슨모빌, 아르메니아 석유사업가 칼루스트 굴벤키안 등 5개 사였습니다. 5개 회사는 레드라인 내에서 단독으로 시추하지 않는다는 포기각서를 쓰고 중동 석유에 대한 배타적인 권리를 갖는다는 선언이었고, 이것이 석유 메이저들 간에 처음으로 이루어진 국제 카르텔입니다. 이처럼 1920년 대, 중동에서 석유생산을 주도하는 외국 기업들이 등장하며 이를 통해 '오일 캠프'가 형성되었습니다. 이로써 중동은 석유 생산과 수출의 중심지로 떠올랐고 국제 정치와 경제에 큰 영향을 미치게 되었습니다. 

 

 

4. 1950년대 이후의 석유의 국유화 움직임

1950년대부터 중동 국가들은 석유 산업을 국유화하려는 움직임을 보이기 시작했습니다. 이로 인해 석유 회사들과 중동 국가 간의 긴장과 갈등이 발생했습니다. 제2차 세계대전을 끝으로 제국주의가 막을 내리고 민족주의가 자리를 잡습니다. 이러한 상황 속에서 본격적인 변화의 시작은 이란에서 벌어집니다. 영국은 이란에 로열티를 16%를 지급하면서 마음껏 착취했는데 종전의 민족주의 바람과 함께 이란 국민들의 분노는 절정에 달했습니다. 1951년 모하마드 모사데크는 압도적인 지지를 받으며 총리가 되었고 곧장 영국의 BP를 국유화하고 군대까지 장악합니다. 이에 영국은 군대 투입을 준비하는데 시설을 재점거해도 현지인들로부터 위험하단 이유로 미국이 완강히 말리면서 군사 개입은 무산됩니다. 이란이 BP를 국유화했지만 BP가 빠진 6대 정유사가 이란산 석유 거래를 중단하자 판로가 없어지면서 이란 경제는 무너지고 꼭두각시였던 팔라비 국왕이 미국에 몰래 도움을 요청하게 됩니다. 미국의 의해 모사데크 정권이 축출되고 이것이 '아작스 작전'인데 이 사건으로 석유패권은 미국으로 완전히 이동하게 됩니다. 이 사건은 국제 카르텔인 7대 정유사에 대한 도전은 산유국 정권 붕괴라는 경고메시지를 전달했습니다. 이런 7대 정유사를 일컬어 세븐 시스터즈라고 칭하며 이후 산유국들은 석유 메이저에게 대항하기 위해 OPEC를 결성합니다. 1950년 사우디는 초기에 45%를 받던 로열티를 50%로 인상하는 이익반분협정을 미국과 맺습니다.

 

5. 오일쇼크

1973년 10월 6일 이집트, 시리아 등 아랍 국가들이 이스라엘을 침공하면서 4차 중동전쟁이 발발했고 아랍 석유수출국기구(OAPEC) 회원국은 석유 금수조치를 단행하면서 유가가 세 배 가까이 치솟는 등 세계 경제가 휘청였는데 이를 제1차 오일쇼크라고 합니다. 이로 인해 석유 수입국들은 석유 재고를 함께 비축하고 비상시 서로 공유하기 위한 국제에너지기구(IEA)를 출범시킵니다. 미국의 도움으로 모사데크를 축출한 친미성향의 레자 팔라비는 근대화를 위한 백색혁명(토지개혁, 세속국가추구, 문맹률 감소, 여성의 기본권확대 및 히잡금지)을 주도합니다. 이 시기 중동은 이슬람 주의로 똘똘 뭉치는 시기였는데 종교의 자유를 보장하는 세속국가를 추구하는 팔라비 2세에 국민들은 상당한 반감을 갖습니다. 비밀경찰인 사바크가 이러한 반감을 폭력적으로 대응하고 1978년 9월 8일 반 팔라비 왕정 시위에 참가한 시민을 향해 무차별 발포를 해 약 2,000명의 국민이 희생됩니다. 이를 계기로 전국의 노동자들이 파업을 하면서 당시 원유 생산국 2위였던 이란의 모든 석유시설이 가동을 멈추게 됩니다. 심지어 사우디가 감산에 돌입하면서 국제 유가가 2배 이상 상승합니다. 결국 1979년 1월 팔라비 2세가 해외로 망명하게 되고 1963년 반정부 시위로 추방되었던 아야톨라 루홀라 호메이니가 귀국합니다. 엄청난 환대 속에 이슬람 신정국가 수립의 국민투표를 하는데 98%의 압도적인 지지로 호메이니 정부가 시작되는데 이를 '이란 이슬람 혁명'이라고 합니다. 이란 혁명에 성공한 호메이니가 주변 이슬람 국가의 시아파를 선동했는데, 당시 이라크 내에서도 수니파 정권의 타도를 외치게 되고 이를 심각한 위협으로 느낀 이라크 대통령 사담후세인이 1980년 9월 22일 이란을 선제공격합니다. 이로 인해 이란의 정유시설이 파괴되고 수출이 중단되면서 이란 혁명 발생 직전 대비 국제 유가가 3배가량 상승합니다.  1978년~1980년 걸친 국제유가의 급등이 제2차 오일쇼크입니다. 이 오일 위기는 석유에 의존하는 국가들에게 석유의 가격 상승으로 인한 에너지 비용 증가 등의 큰 영향을 미쳤고, 미국과 유럽연합 등 서유럽 국가들은 중동 지역에서의 영향력을 증가시키는데 주력하게 했습니다. 

 

 

결론

중동 지역은 석유의 역사와 생산에 있어서 중요한 역할을 해왔으며, 이는 전 세계의 경제와 정치에 큰 영향을 미치는 중요한 요소 중 하나입니다. 현재까지도 중동은 석유 공급과 가격을 조절하는데 큰 역할을 하고 있으며, 미래에도 에너지 산업의 중심지로 남을 것으로 예상됩니다.

 

중동에서의 석유의 역사와 세계 경제에 미치는 영향에 대해 알아보았습니다. 다음에는 새로운 주제에 대해 알아보도록 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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