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국제정세

팔레스타인과 이스라엘 역사와 분쟁원인

by 자연과더불어 2023. 10. 12.

팔레스타인 지역은 수 천년에 걸쳐 다양한 왕조가 생겨나고 멸망했습니다. 오늘은 팔레스타인 지역의 역사와 팔레스타인-이스라엘의 분쟁의 원인에 대해 알아보도록 하겠습니다. 

 

 

 

1. 팔레스타인 지역의 역사

팔레스타인은 구석기시대 전기부터 인간이 살고 있었고, 카르멜산에서 출토된 네안데르탈형 및 호모사피엔스형 화석인골은 인류진화를 보여주는 중요한 표본으로 유명합니다. '가나안'이라 불리었고 '팔레스타인'이란 말은 BC12세기 그리스 남부에서 이주해 온 필리시테인에서 유래합니다.  BC11세기 헤브라이인들이 이스라엘 왕국을 건설하여 솔로몬왕 시대에는 찬란한 영화를 누렸으나 솔로몬이 죽은 뒤 이스라엘과 유다로 분열되었습니다. 그 이후 이스라엘은 아시리아에 BC8세기, 유다왕국은 신바빌로니아에 BC6세기에 멸망했습니다. 그 이후 BC4세기에 알렉산드로스 대왕, BC1세기에는 로마제국의 지배하에 들어갔고 로마제국은 지명을 유다에서 시리아 팔레스티나로 변경하였습니다. 636년 이슬람교 아랍인들이 로마를 격파한 후 오스만투르크령시대(1516년~1917)를 포함 이슬람교도들의 지배가 계속되었고 다만 12세기엔 제1차 십자군이 예루살렘왕국을 건설하기도 했습니다. 이러한 역사로 인해 이 지역엔 유대교, 그리스도교, 이슬람교의 성지가 함께 있는 종교적 숙명을 안게 되었습니다. 

 

2. 팔레스타인인의 정의

1948년 이스라엘 건국 이전엔 팔레스타인 지역에서 태어났거나 팔레스타인지역 출신의 모든 사람을 의미했습니다.

1948년 이후에 팔레스타인인은 서안지구와 가자지구에서 태어난 비유대인 공동체 출신의 팔레스타인 국가의 시민을 의미하는 경향이 있습니다. 팔레스타인인은 레바논, 시리아 및 기타 아랍국가에 살고 있지만 이스라엘, 서안지구, 가자지구 및 요르단에 집중되어 살고 있습니다. 

 

 

3. 팔레스타인 난민

2차 세계대전 이전까지 영국의 위임 통치령에 놓여있던 팔레스타인 지역에 1948년 5월에 이스라엘을 건설하자 이곳에 2,000여 년간 살았던 110만여 명의 아랍인들이 살 땅을 잃게 되었습니다.

 

https://jayeon7.tistory.com/9

 

중동석유의 역사와 세계경제

원유 매장량과 생산량의 국가별 순위를 보면 50% 이상 중동 국가들이 포함되어 있습니다. "중동의 석유를 지배하는 자가 세계를 지배한다"는 말이 있듯 중동의 석유는 세계 경제에 많은 영향을

jayeon7.tistory.com

 

4. 이스라엘민족의 방랑기

분단되었던 이스라엘과 유다왕국의 멸망 후 페르시아의 도움으로 유대왕국을 재건하기도 했지만, 페르시아의 멸망 후 로마제국의 지배를 받게 됩니다. 로마에 저항하며 독립전쟁을 일으키기도 했지만 로마에 진압되어 강한 탄압을 받습니다. 이후 오스만제국이 장악하면서 중세부터 이어진 긴 방랑의 시대가 시작되었습니다. 땅을 잃고 서유럽과 러시아 등지로 흩어졌고 유럽인들은 재난이나 재앙이 닥치면 유대인들이 그 원인이라고 하며 탄압을 했습니다. 경제활동에도 큰 제약을 받았으며 중세 기독교에서 천대 시 하는 금융업으로 한정되어 일하게 되었습니다. 이로 인한 영향으로 베니스상인에서 주인공을 괴롭히는 고리대금업자로 유대인이 등장했습니다. 역설적으로 천 대시하던 금융업을 통해 부를 쌓게 되고 시대가 변하면서 거대한 자본가로 성장하여 국제 경제에서 큰 영향력을 가지게 됐습니다. 중세를 지나 근대로 접어들어서도 유대인에 대한 탄압은 심했고 1880년대부터 무려 40여 년간 러시아와 동유럽에서는 유대인들을 학살하는 비극의 역사가 있었습니다. 그러던 중 1894년에 독일과의 전쟁에서 참패한 이후 프랑스는 애국주의가 극단적인 형태로 나타났고 유대인에 대한 적대감이 한층 커지던 시기 유대인 장교 드레퓌스는 적국 독일을 이롭게 했다는 간첩혐의로 체포가 되었습니다. 증거는 근거가 부족하고 사실과 달랐지만 공정한 재판의 기회를 부여받지 못하고 종신형을 선고받아 투옥되었고 프랑스 대문호 에밀졸라 등 양심적인 지식인들과 진보적인 정치세력들이 구명에 나서 결국 재심에서 무죄를 선고받습니다. 이를 계기로 유대인들은 프랑스에서마저 그들의 자리가 없다는 사회적 인식은 그들의 조상이 살던, 팔레스타인 지역에 유대인 국가를 건설하려는 유대 복고주의 운동인 시온주의 운동을 일어나게 했습니다.

 

5. 팔레스타인-이스라엘의 갈등의 원인 

1896년 헤르츨이 주창한 시온주의는 큰 호응을 얻었고 기금을 조성하여 팔레스타인 지역의 땅을 매입합니다. 땅의 매입을 통해 텔아비브에 유대인 정착촌을 건설하기 시작하고 이런 움직임은 이 지역에 살고 있던 팔레스타인인들에게는 큰 위협이 되었습니다. 1914년 영국, 프랑스, 러시아 연합군과 독일, 오스트리아, 오스만제국 연합군 간의 제1차 세계대전이 발발하였고 이 시기 영국은 오스만제국을 압박하며 이들이 지배하고 있는 영토에 대한 야심을 가졌습니다. 이에 영국은 아랍국가 건설 지원을 약속하며 아랍민족들과 손을 잡았고, 동시에 팔레스타인 지역에 국가 건설을 열망하는 유대인 세력과도 손을 잡았고, 이에 그치지 않고 연합국이었던 프랑스와 중동을 분할하기로 밀약했습니다. 이런 영국의 3중 밀약이 결과적으로는 지금의 이스라엘과 팔레스타인인 간 갈등의 시작점이었습니다. 세계 1차 대전 이후 영국은 약속을 이행하지 않고 프랑스와 중동을 분할통치하였습니다. 약속을 이행하지 않는 영국에 대한 유대인과 아랍인들의 반발은 커졌고, 유대인의 정착촌이 늘어나며 팔레스타인 영역을 지속적으로 침범하자 팔레스타인인들의 분노는 극에 달했고 1936년 영국에 대한 반란으로 나타났습니다. 이를 계기로 팔레스타인인들은 팔레스타인의 독립과 유대인들의 입국금지를 조건으로 제시하였고 영국은 이를 수용했습니다. 이로 인해 유대인 강경파의 반발을 불러왔고 영국을 향해 테러를 감행하고 팔레스타인인들과의 갈등으로 유혈충돌로 이어지는 등 극심한 혼란이 발생했습니다. 이런 상황에서 중동에 대한 영향력을 확대한 미국이 등장하면서 미국의 자국 내 큰 영향력이 있는 유대인들을 의식해 유대인 국가의 국가 건설을 적극지지하며 혼란을 가중시켰고 결국 이 문제는 UN에서 논의되기 시작합니다. UN은 유대인과 팔레스타인 간 영토 분할에 대한 투표를 진행했고 이를 승인해 유대인들은 그들의 국가를 건국할 명분을 얻을 수 있었지만 팔레스타인인들은 그들이 살던 영토의 반 이상을 잃게 되면서 사태의 해결이 아닌 또 다른 문제를 불러왔습니다. 

 

팔레스타인 지역의 역사, 팔레스타인 자치정부와 이스라엘의 충돌원인에 대해 알아보았습니다. 다음에도 흥미로운 주제에 대해 알아보도록 하겠습니다. 

 

 

 

 

 

'국제정세' 카테고리의 다른 글

중동석유의 역사와 세계경제  (0) 2023.10.1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