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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

12.12 군사반란에 대해 알아보기

by 자연과더불어 2023. 11. 29.

영화 서울의 봄이 2023년 11월 22일 개봉하고 좋은 평가를 받고 흥행하면서 1979년 12.12일에 일어난 군사반란에 대한 관심이 많아졌습니다. 오늘은 12.12 군사반란에 대해서 간단히 알아보겠습니다.

 

 

 

1. 5.16 정변의 가담과 권력에 대한 탐욕

박정희의 사망으로 계엄이 선포되고 총리였던 최규화가 대통령 권한대행, 전두환 보안사령관이 합동수사본부장이 되었습니다. 이 시기 권력의 중심이었던 최규화 대통령권한은 권력욕이 없었고 계엄 사령관인 정승화 참모총장은 야전군인으로 정치에는 관심이 없었습니다. 소장이었던 전두환은 상관인 중장들이 함께 있어도 상석에 앉아 거침없이 회의를 주도했고 합동수사본부장이 된 이후에는 권력을 행사함에 있어 주저함이 없었습니다. 사실 전두환은 박정희가 일으킨 5.16 정변 때 서울대학교 ROTC교관으로 있었는데 육사생도와 졸업생을 동원해서 시가행진을 시켰는데 시민들이 환호하고 박수를 보냈습니다. 5.16 군사 정변을 진압하려고 했던 미 8군 사령관은 시민들이 환호하는 모습을 보고 민심이 기울었다고 보고 진압을 포기했습니다. 이를 통해 대위였던 전두환은 박정희의 눈에 들어 국가재건최고회의 의장인 박정희의 민원비서관의 자리에 임명되며 탄탄대로를 걷게 되었습니다. 전두환은 18년 동안 박정희 옆에서 강한 힘으로 찍어 누르면 된다는 권력에 대한 잘못된 인식을 갖게 됩니다.

 

출처 연합뉴스

2. 전두환의 야욕

최규하 대통령 권한대행이 대통령 선거에 나서자 전두환은 정승화 참모총장에게 찾아가 90% 이상 득표를 올려야 하지 않느냐며 말합니다. 이 말을 들은 정승화 참모총장은 전두환이 정치에 개입하려는 걸 눈치채고 군인은 정치개입을 하지 말아야 한다며 대노합니다. 전두환은 대통령 사망을 마치 쿠데타 상황에서 권력을 잡은 것처럼 행동하려고 했던 것입니다. 전두환은 합동수사본부장으로 청와대를 수색하던 중 9억 원을 발견하고 못마땅해하는 정승화 참모총장을 회유하기 위해 그중 2억 원을 정승화 총장에게 주려고 찾아갑니다. 이에 정승화 총장은 화를 내며 국고로 환수하라고 말합니다. 그로 인해 군 내부에선 정승화 참모총장이 전두환을 좌천시킬 거란 소문이 파다하게 퍼졌고 당시 미 8군 사령관도 소문을 들었다고 합니다. 전두환은 권력 장악을 위해 가장 위협이 되는 계엄사령관인 정승화 참모총장을 체포하기 위해 10.26 사건의 배후에 정승화 참모총장이 있다는 논란을 점화시킵니다.

 

 

3. 군사반란을 위한 계획

하나회는 박정희 시절 박정희의 후원으로 생긴 군대 사조직으로 경상도, 육군사관학교 출신들로 이루어진 모임입니다. 보안사령관으로 임명된 전두환은 하나회 회원들을 수도권 주변부대로 임명해 관리하면서 군대를 장악하기 시작했습니다. 이런 전두환 등 육사출신 장교들의 움직임이 심상치 않음을 안 미 8군 사령관은 12.12 한 달 전쯤 당시 국방장관이었던 노재현에게 이 사실을 알려주었습니다. 이 소식을 듣고 노재현은 별일 아니라는 듯 넘어갔는데 사실 노재현은 전두환을 보안사령관으로 추천했던 인물이고 사석에선 형님 동생이라 부르며 각별한 사이였다고 합니다. 군사반란의 한 달 전이라 충분히 막을 수 있었음에도 이 기회를 놓치는  순간이었습니다.

출처 서울의 봄

 

 

4. 반대 세력의 제압 및 군사 반란

군 내부의 사람들을 자기 사람들로 만들면서 군사반란을 계획하던 전두환은 1979년 12월 12일 가장 경계하던 정병주 특전사령관, 장태완 수경사령관, 김진기 헌병감에게 식사를 하자며 연희동의 한 요정으로 초대했습니다. 김진기 헌병감은 요정에 오기 전 헌병감실에 요정번호를 알려놓고 나와 정승화 참모총장이 체포되었다는 연락을 받고 요정에 있던 다른 장군들에게 그 소식을 알립니다. 소식을 듣고 장태완 수경사령관이 직속부하들을 소집하는데 장세동, 김진영 등이 소집에 불응하고 노태우 9사단 사단장, 유학성 중장 등과 같이 반란군에 가담해 경복궁 30 경비사단에 있다는 걸 알게 되고 격분하게 됩니다. 이 시각 전두환의 반란세력 일부는 정승화 참모총장을 체포하기 위해 한남동 총장공관으로 향했고 전두환은 정승화 참모총장의 체포에 대한 재가를 받기 위해 삼청동 총리공관에 갔습니다. 최규하 대통령은 재가를 받기 위해 혼자 온 전두환에게 재가를 해주지 않습니다.

정승화 참모총장(왼쪽)  장태완수도방위사령부 사령관(오른쪽)  출처 서울의 봄

 

 

전두환은 체포에 대한 재가를 받지 못했지만 정승화 참모총장을 체포하고 보안사로 끌고 갑니다. 육군본부로 복귀한 김진기 헌병감은 전두환이 반란을 일으켰단 것을 인지하고 총리공관에 있던 전두환을 체포하기 위해 총리공관 헌병 특별경호대장 구정길 중령에게 체포 명령을 내리지만 이미 하나회 세력에게 무장해제 된 뒤였습니다. 이 당시 전두환의 반란세력에 가담한 특전사 1 공수여단, 5 공수여단은 김포에서 서울로 서부전선을 지켜야 하는 노태우의 9사단은 북서쪽에서 서울로, 2 기갑여단, 30사단, 3 공수여단도 서울로 진격하며 쿠데타에 참여하게 됩니다. 이중 3 공수여단의 15 대대장인 박종규는 직속상관인 정병주 특전사령관을 체포하기 위해 총장공관에 침입해 정봉주 사령관을 지키던 김오랑 소령을 죽이고 정병주 사령관에게 총상을 입혀 체포하게 됩니다. 특히 10.26 사태 이후 북한의 무력 도발이 우려되는 시기에 서부전선의 최전방을 지키던 노태우의 9사단에서 1개 연대를 빼내 서울중심지로 진격시키며 나라의 안보를 위협했습니다. 장태완 수경사령관도 직속부하인 조홍 헌병단장에게 체포됩니다. 전두환 반란세력에 반대했던 정승화 참모총장, 정병주 수경사령관, 장태완 특전사령관, 김진기 헌병감이 체포되며 전두환은 군대를 장악하게 됩니다. 

정병주 특전사령관(왼쪽)    김오랑소령(오른쪽)    출처 서울의 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