KBS2 역사드라마 고려거란전쟁이 방영되고 있는데 귀주대첩으로만 알려져 있는 강감찬의 생애와 귀주대첩의 활약상에 대해 간단히 알아보겠습니다.
1. 강감찬의 생애
강감찬은 고려 정종 3년인 948년에 금천(현재 서울 봉천동)에서 태어났습니다. 그의 아버지는 태조 왕건을 도와 고려 개국에 일조한 삼한벽상공신 강궁진입니다. 강감찬은 성종 2년인 983년에 문과에 장원으로 급제했는데 35살의 꽤 늦은 나이였습니다. 강감찬은 강조정변 이후인 1009년 예부시랑의 관직에 오르기 전까지는 고려사에 등장하지 않습니다. 강감찬은 젊은 시절부터 학문을 좋아하며 지략이 뛰어났고 명문귀족 출신임에도 검소한 생활을 즐겼다고 전해집니다.
2. 고려-거란 3차 전쟁
2차 전쟁에서 개경까지 침략해 고려 현종의 친조를 약속받고 철군했지만 현종이 친조의 약속을 지키지 않으면서 거란 성종은 다시 고려를 굴복시키기 위해 절치부심합니다. 거란은 고려에 대한 대대적인 침공을 계획하며 속전속결로 개경으로 진군해 현종을 잡을 대담한 전술을 세웠습니다. 거란 성종은 1018년 10월 고려에 선전포고를 하고 개경직공을 위해 병력수를 줄이고 최정예인 황제 친위군을 중심으로 10만 명을 편성했습니다. 고려는 이에 강감찬을 최고 사령관인 상원수로 임명하고 국경에 20만 명을 배치했습니다. 거란은 고려가 성을 지키는 청야전술을 쓸 거라고만 예측했는데 강감찬은 기병 1만 2천 명을 흥화진성 동쪽 삼교천에 매복시켰습니다. 개경직공의 거란족은 흥화진을 놔두고 고려군이 매복해 있는 곳으로 남하하기 시작했습니다. 큰 밧줄로 소가죽을 엮어 성 동쪽의 큰 강을 막고 기다리던 고려군은 거란족이 계곡을 도하하자 소가죽으로 된 둑을 터뜨렸습니다. 뜻밖의 공격에 거란군은 전열이 흩뜨려졌고 매복하고 있던 고려군이 공격하며 거란군에 큰 타격을 입힙니다. 이런 기습공격에도 백전노장인 소배압은 군사를 수습해 개경을 향해 다시 남하하기 시작합니다. 이에 강감찬은 기병 1만여 명을 개경의 방어를 위해 개경으로 급파했고 남하하는 거란군을 추격하기 위해 강민첨 부대를 보내 교전을 하면서 거란군의 진격속도를 늦추었습니다. 거란군은 강민첨부대의 집요한 추격과 그로 인한 큰 피해에도 불구하고 개경 근처까지 진출하게 됩니다. 2차 전쟁과는 달리 현종은 개경을 포기하지 않고 성문을 닫고 거란군에 대항하며 맞서 싸웠고 이에 소배압은 후퇴를 결정하게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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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려거란전쟁, 2차침공과 양규장군의 활약상
거란의 2차 침공은 거란황제가 직접 군사를 이끌고 온 전쟁으로 대부분의 병력은 기병으로 구성되어 있었습니다. 거란군은 그동안 송나라와의 수많은 전투로 인해 전쟁에는 능숙했습니다. 1. 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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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귀주대첩
강감찬은 고려의 주력부대를 귀주로 집결시켰고 병마판관 김종현에게 기병 1만 2천 명을 주고 후퇴하는 거란군을 추격하며 귀주로 유인해 성이 아닌 벌판에서 마주하게 됩니다. 1019년 2월 2일 귀주의 벌판에서 고려군과 거란군은 서로 승기를 못 잡고 치열한 전투를 벌이던 중 강한 동남풍이 불고 비가 내리기 시작했습니다. 거란군은 거센 맞바람에 당황했고 고려군의 화살공격에 속수무책으로 당했습니다. 더불어 후퇴하던 거란군을 쫓고 있던 김종현의 기병이 거란군의 후미를 치면서 거란군은 완전히 무너지며 대부분의 병력을 잃게 됩니다. 이 당시 송나라까지 굴복시키며 세계 최고의 전력을 자랑했던 거란은 이렇게 귀주에서 처참하게 강감찬의 고려군에게 패배하면서 993년부터 이어진 고려거란전쟁은 끝나게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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