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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

고려 현종의 생애와 업적

by 자연과더불어 2023. 12. 21.

KBS 대하드라마 고려거란전쟁에 현종이 나오는데 고려시대 성군으로 알려진 현종의 생애와 업적에 대해서 간략하게 알아보겠습니다.

1. 불우한 어린 시절

왕순(현종)은 왕건의 손녀였던 헌정왕후와 왕건의 아들인 안종(왕욱)의 불륜으로 992년 8월 1일 헌정왕후 사저에서 태어난 사생아였습니다. 불륜이 들통난 왕욱은 경상도 사천으로 유배를 가게 되고 헌정왕후는 왕순(현종)을 낳다가 죽었습니다. 이렇게 고아가 된 왕순은 슬하에 자식이 없던 당시 고려의 왕인 성종이 키우게 됩니다. 부모 없이 크는 왕순을 불쌍히 여긴 성종이 아버지 왕욱이 있는 경상도 사천으로 왕순을 보내 아버지와 같이 지내게 합니다. 아버지인 왕욱과 행복하게 살던 왕순은 3년 만에 아버지인 왕욱을 여의고 다시 개경으로 돌아오게 됩니다. 개경으로 돌아와 성종의 보살핌을 받던 왕순은 그해 다시 성종의 죽음을 맞이하게 됩니다. 997년 성종의 뒤를 이어 고려 5대 왕 경종과 헌정왕후의 누이인 천추태후의 아들인 목종이 고려 7대 왕에 오르게 됩니다. 목종 6년 가짜 승려인 김치양과 사통으로 아이를 낳은 천추태후는 유행간 등 예쁜 남자를 가까이하며 슬하에 자식이 없던 목종의 뒤를 이어 김치양의 아이에게 왕위계승을 하려고 했습니다. 태조왕건의 혈통인 왕순이 왕위계승에 위협이 된다고 생각해 당시 12살인 왕순을 서울 삼각산(현재 북한산)에 있는 신혈사라는 암자로 보내게 됩니다. 암자로 보낸 것도 모자라 천추태후는 독이 든 음식을 보내 독살하려 했고 이를 실패하자 자객을 보내 왕순을 여러 번 제거하려고 했습니다. 다행히 신혈사에는 진관이라는 스님이 있어 보내온 음식을 까치 등 새에게 미리 먹여 확인하고 불상아래 굴을 파 왕순을 숨기는 등 많은 도움을 주었습니다. 왕이 된 후 왕순은 진관 스님의 은혜를 갚기 위해 신혈사를 진관사로 바꿔 크게 확장시켜 주고 많은 재물을 시주했습니다. 현재 진관사는 북한산 자락에 위치하고 있습니다.

KBS 제공

 

2. 천추태후의 국정농단과 강조의 정변

천추태후는 김치양을 우복야 겸 삼사사로 승진시키며 목종을 허수아비로 만들고 권력을 장악했습니다. 김치양은 그러한 권력을 바탕으로 많은 뇌물을 받아 300여 칸에 달하는 집에서 호화로운 생활을 영위했습니다. 김치양은 본인의 사람들로 요직을 차지하고 그의 아들이 태어나자 후사가 없던 목종의 후계자로 아들을 잇게 하고 싶었습니다. 천추태후와 김치양이 그들의 아들로 다음 왕위를 노린다는 것을 안 목종은 강직한 신하로 생각한 서북면 도순검사 강조에게 편지를 보냅니다. 왕명을 듣고 개경으로 오던 강조는 목종이 죽었다는 소문을 듣고 다시 본영으로 돌아가다가 목종이 살아있다는 것을 알고 망설이다가 다시 개경으로 진격하게 됩니다. 개경에 들어온 강조는 천추태후와 김치양을 체포하고 김치양과 그의 아들을 죽입니다. 강조는 유행간 등의 간신에 휘둘리던 목종도 폐위시키고 천추태후와 함께 유배를 보내고 태조 왕건의 혈통인 왕순을 고려 8대 왕으로 즉위시킵니다. 

KBS 제공

 

3. 개경 탈출과 험난한 피난길

강조의 30만 대군이 통주성에서 거란군과의 대회전에서 대패했고 승리한 거란군은 개경으로 향합니다. 성벽과 방어시설이 없던 개경에서 거란군과 싸울 수 없었던 현종은 개경을 버리고 태조 왕건의 둘째 부인인 오 씨의 세력이 있던 전라도 나주로 피난길에 올랐습니다. 피난 행렬은 두 명의 부인, 신하들, 장수 지채문, 금군 50명 등 매우 적은 규모였고 피난길에 지방향리, 도적들이 왕을 위협해 재물을 터는 등 험난한 피난길이었습니다. 적성현(파주)에서는 그 지역 군인들이 현종을 죽이려고까지 했는데 지채문이 그들을 활로 쏘아 죽여 위기를 벗어났다고 합니다. 

KBS제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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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려거란전쟁. 지채문은 누구인가

KBS2 역사드라마 고려거란전쟁이 인기리에 방영되고 있고 고려거란전쟁에서 활약한 많은 장수들이 등장합니다. 오늘은 피난길에 오른 현종을 지킨 지채문 장군에 대해서 알아보겠습니다. 1. 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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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 개경복귀와 포용력

곽주성에 6,000여 명의 군사를 배치하고 개경으로 진격했던 거란 성종은 양규에 의해 곽주성이 함락되자 후방이 차단될 것을 우려해 훗날 현종의 친조 등 형식적인 항복만 받고 급하게 후퇴하게 됩니다. 거란군의 후퇴로 다시 개경으로 돌아온 현종은 국정을 휘어잡고 있던 강조의 죽음과 나주세력의 지지로 더 이상 허수아비가 아니었습니다. 피난 중에 자신을 공격했던 지방 향리들에게 복수하지 않고 용서해 주는 포용력도 보여주었습니다. 다시 거란이 침략해 올 것을 안 현종은 궁녀의 수를 줄이고 많은 사료를 먹는 동물원을 없애고 전쟁으로 먹기 힘들어진 백성들에게 세금을 감면해 주는 등 직접 솔선수범하며 거란의 침공에 대비했습니다. 

 

5. 거란의 패배와 고려의 전성기

1018년 거란은 왕의 친위대를 비롯한 최정예 10만 명의 병력으로 개경직공의 전술로 고려를 침공했습니다. 강감찬, 강민첨 등 유능한 장군들을 요직에 앉히고 거란의 침공에 대비한 현종은 귀주에서 거란군을 대파하며 고려거란전쟁을 승리로 이끌었습니다. 전쟁 이후 현종은 송나라와 사대관계가 아닌 동등한 관계로 외교를 맺었으며 수도인 개경에 나성을 축조해 유목민들의 공격에 대비했으며 고려 왕실에서 흔히 벌어졌던 근친혼의 풍습도 없애기 시작했습니다. 이런 현종의 업적을 토대로 고려는 200여 년에 걸쳐 외세의 침략을 당하지 않는 태평성대를 이룩하게 됩니다. 

KBS제공