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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

히타이트 문명의 역사

by 자연과더불어 2023. 10. 18.

히타이트인들(Hittites)은  현재 튀르키예 중앙 북쪽의 아나톨리아 지방에 제국을 세웠고 고대 트로이 전쟁의 무대인 '트로이'도 이곳 아나톨리아 반도에 있었습니다.  19세기 이전까지 역사에서 잊혀있던 히타이트 문명은 1870년 시리아의 하마라는 지역에서 히타이트족들의 글자가 새겨진 돌들이 발견되어 연구되기 시작합니다. 

 

 

1. 히타이트의 역사

히타이트인들은 기원전 2000년 경 할리스강이 시작되는 중앙 고원 지대의 일부를 점령하면서 소아시아 반도에 정착하기 시작합니다. 초기 인도·유럽어족의 문화들이 그러했듯 히타이트의 지배자는 일반 회의에서 왕으로 선출되었으며 단순히 귀족들 중의 우두머리였습니다. 하투스를 수도로 정한 이후 점차 중앙집권화되고 왕권이 강화되었습니다. 왕권 강화와 함께 정복 사업을 시작하여 16세기말에는 바빌로니아를 함락시켰지만 인접한 강국인 미탄니 왕국과의 끊임없이 충돌하며 영토 확장에 제약을 받았습니다. 기원전 14세기 이르러서 수필루리우마시 대왕이 강대하던 미탄니 왕국을 정복하고 그 여세를 몰아 남부 시리아까지 세력을 확장하였습니다. 기원전 1286년 무와탈리시왕은 이집트의 람세스 2세와 시리아 전역의 패권을 놓고 격돌하게 되었고 인류 역사상 최초로 철을 주조해 만든 철기와 말이 끄는 전차를 사용한 히타이트가 승리했다고 추정됩니다. 이로 인해 히타이트 제국은 절정에 이르렀지만 기원전 1200년 경 '바다의 민족'의 침입으로 역사상 자취도 없이 사라지고 말았습니다. 히타이트의 수도 하투샤는 앙카라 동쪽 150km의 1,000m 고원지대 정상과 비탈면에 8km 이중 성벽으로 둘러싸여 건설되었습니다. 이로 인해 하투샤보다 규모가 훨씬 작은 트로이는 호메로스의 서사시로 인해 서양 문화사에 큰 영향력을 행사했지만 에게해에서 코카서스, 흑해에서 시리아를 지나 레바논 끝까지 뻗어나간 영토를 가졌던 히타이트는 그 후 인류 역사에서 잊혔습니다. 

 

2. 히타이트 명칭의 유래

히타이트란 명칭은 종족 이름인 하티족에서 유래되었다고 합니다. 구약성서에 하티족은 헷족으로 기록되어 있고, 다윗의 아내이자 솔로몬 왕의 어머니인 밧세바가 헷족 여인이었다고 합니다. 

 

3. 히타이트의 정치체계

왕, 왕비, 판쿠라는 귀족회의를 통해 삼권분립의 정치체계를 가지고 있었습니다. 일반적으로 알고 있는 왕과 왕비 사이와는 약간의 차이가 있습니다. 왕은 타바르나라고 불렸으며 왕비는 제사장의 역할도 동시에 맡아 타와난나라고 불렸습니다. 귀족회의인 판쿠는 타브르나와 타와난나의 계승을 비준하는 역할을 맡았는데 왕이 자신의 아들이라고 왕권을 바로 물려줄 수 있는 건 아니고 판쿠의 동의를 받아야만 했습니다. 

 

4. 히타이트의 법률

메소포타미아 문명권은 고바빌로니아의 함부라비 법전으로 유명한데 히타이트도 최초의 보상금 제도가 들어있는 등 200가지 문제를 다루는 법전을 가진 높은 수준의 법을 갖춘 나라였습니다. 이 법전은 상황의 변화에 따른 개정 또는 개혁의 흔적이 보이며 그 지역의 관습과도 조화를 이룬 것으로 보입니다. 아래와 같은 내용들이 법전에 있었습니다.

● 실수로 사람을 죽였을 경우 그 자의 노동력에 해당하는 만큼의 노예로 보상한다.

● 결혼 후 여자가 행한 간통은 사형이다.

● 황소 한 마리를 훔친 자는 과거에는 30마리로 보상했지만 이제는 15마리만 보상한다.

 

5. 히타이트의 종교

히타이트는 다른 민족을 정복하면 히타이트의 종교를 그들에게 전파하는 게 아니라 그들의  신을 받아들여 하투샤에서 숭배했습니다. 이때 원래의 기도문 등을 그대로 옮겨와 피정복민의 언어 역시 하투샤에 도입되었고 하투샤에서 8개의 언어가 확인되었습니다. 천둥과 비의 신인 테슈브를 가장 높이 숭배했는데 이집트에서 영생과 윤회의 상징이었던 연꽃이 전파되어 날개 달린 연꽃 모양을 하고 있습니다. 테슈브의 이름은 켈트족들에게 전해져 갈리아인과 아일랜드인들이 숭배했던 천둥의 신 타라니스가 되었습니다. 

 

6. 카데시 전투

최초의 세계대전이라 불리며 이집트 기록에 의하면 기원전 1274년 5월 12일 시리아의 카데시에서 이집트의 람세스 2세와 히타이트의 무와탈리스 2세 간에 벌어졌습니다. 이집트군이 2만 5천 명이고 히타이트군은 4만 5천 명으로 합계 7만 명의 대군이 동원된 전투였습니다. 이집트의 룩소르의 카르낙 신전과 룩소르 신전의 부조와 라메세움 장제전 및 아스완의 아부심벨 신전입구 홀 벽에 새겨진 부조에 카데시 전투 장면이 등장하며 이집트의 승리로 기록되어 있습니다. 

1906년 히타이트의 수도였던 튀르키예 앙카라 동쪽 보아즈칼레에서 발견된 점토판에 전투의 상세한 전적 보고서가 기록되어 있어 이를 통해 3,200년 간 이어진 람세스의 승전 주장은 과장된 것으로 추정됩니다.  이처럼 역사는 한나라의 일방적인 기록만으로는 정확한 사실을 알 수 없다는 것입니다. 

 

7. 카데시 조약

히타이트가 이집트의 람세스 2세와 전쟁을 벌일 때 전쟁이 10년 넘게  지속되자 양국의 국력 소모를 막기 위해 평화조약을 맺었습니다. 이 조약이 최초의 평화조약으로 점토판에 기록으로 남겨졌고 원판은 이스탄불 고고학 박물관에 보관되어 있습니다. 현재 뉴욕 유엔 본부 1층에 모형으로 전시되어 국제조약의 중요성을 강조하고 있습니다. 

 

8. 히타이트의 멸망

이집트의 기록에 의하면 1,250년 경 "바다의 민족"이 연안에서 나타나 도시를 휩쓸었고 소마차로 구성된 육상대가 히타이트를 멸망시켰다고 전해지며 히타이트를 멸망시킨 "바다의 민족"이 누구인지는 알 수 없습니다.

 

히타이트 문명의 역사에 대해 알아보았습니다. 다음에도 흥미로운 주제에 대해 알아보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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